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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사람이 더 아프게 한다 - 사랑과 책임
  • 작성일0000/00/0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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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이봉희 교수의 문학치유카페『내 마음을 만지다』p.124-129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왜 서로 사랑했는데 그 사람은 떠나고 나만 여기에 남아 있을까요? 우리는 함께 사랑한 것이 아니었나요? 그렇다면 우리의 사랑은 대체 무엇이었죠? 사랑이 길들이기라면 그것은 서로를 함께 길들이는 것 아닌가요? 길들여져 남겨진 사람은 또 어떻게 혼자서 살아가야 하나요?"
 최근 이별을 경험한 한 분이 물었습니다. 나는 대답 대신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꺼내듭니다. 작품 속에서 여우는 어린왕자에게 사랑이란 서로를 길들여서 오직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여우는 누군가가 내게 그토록 소중한 것은 "그를 위해서 보낸 시간"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우가 말했다.
"넌 아직 나에겐 수많은 다른 소년들과 다를 바 없는 한 소년에 지나지 않아.
 그래서 난 네가 없어도 조금도 불편하지 않아. 너 역시 마찬가지일 거야.
 난 너에게 수많은 다른 여우와 똑같은 한 마리 여우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나는 너에게 오직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거야."
 
 - 생텍쥐페리, <어린왕자>중에서
 
 
너와 내가 함께 보낸 특별한 시간들
 
 서로를 길들여서 특별한 존재가 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간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보통 어제, 오늘, 내일, 일 년, 십년처럼 흘러가는 시간을 말하는 크로노스 Chronos, 그리고 어떤 목적을 향해 진행되는 시간인 카이로스 Chronos, 그리고 어떤 목적을 향해 진행되는 시간인 카이로스 Kairos 이 두 가지입니다. 카이로스는 우리 삶 속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시간입니다.
 여우가 말하는 시간이 바로 카이로스입니다. 카이로스 시간 속에는 하루를 십 년처럼 느낄 수 있는 만남이 있습니다. 또 십년이란 세월 동안 방향을 잃은 채 그저 표류하는 만남도 있습니다. 더욱 불행한 것은 그 긴 시간 동안 침잠해버린 경우입니다. 내면으로의 침잠은 더 높은 비상을 위한 영혼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관계인 나와 너 사이에서 침잠의 시간은 새로은 가능성을 막아버리는 상실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카이로스의 시간은 양적인 시간과는 다른게 각자 다양한 의미로 기억됩니다.
 
 
사랑이란 길들이기와 길들여지기
 
 어린왕자는 여우를 길들입니다. 그리고 여우 덕분에 사랑의 의미를 깨닫고는 여우를 떠나 자신의 장미에게 돌아가려고 합니다. 어린왕자는 자신의 장미가 특별한 이유를 그를 위해 보낸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여우에게는 어린왕자와의 짧은 만남이 어린왕자와 장미와의 만남 못지않게 중요하고 긴 '시간'입니다. 이별의 순간, 어린왕자는 홀로 남겨지는 여우에게 말합니다. 너를 길들인 것, 그것은 네가 원한 것이었다고. 그러니 내 탓이 아니라고 말하고는 떠나가 버립니다.
 
 출발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 여우는 말했다.
 "아아! 난 울음이 나올 것 같아."
 "그건 네 잘못이야. 나는 너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내가 널 길들여 주길 원한 건 바로 너잖아." 어린왕자가 말했다.
 "그건 그래." 여우가 말했다.
 "그런데 넌 울려고 하잖아!" 어린왕자가 말했다.
 "그래, 정말 그래. " 여우가 말했다.
 "그러니 넌 얻은 게 아무 것도 없잖아!" 어린왕자가 말했다.
 "얻은게 있지. 저 밀밭의 색깔이 있으니까."
 
 물론 여우의 고통은 지난날의 행복에 이미 포함된 것인지 모릅니다. 여우는 "지난날의 행복의 일부"로 존재했던 현재의 고통을, 그런 사랑을 선택한 것입니다. 여우도 언젠가는 어린 왕자가 떠날 거라고, 그 미래의 고통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현재의 행복을 선택했고, 자신을 길들여달라고 했으니 말입니다. 어쩌면 고독하고 외로운 여우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는지 모릅니다.
 이제 홀로 남겨진 여우는 어린왕자의 금발을 닮은 밀밭을 보면서 어린왕자를 기다릴 것입니다. 나타나지 않을 것을 알지만 그래도 이미 습관이 된, 그의 말대로 '길들여진' 기다림과 그리움이 없다면 여우는 어떤 희망으로 하루를 살 수 있을까요? 그런 여우를 어린왕자는 어떻게 생각할까요? 혹시 부담스러워할까요? 그래서 밀밭을 피해 멀리 도망치지는 않을까요? 함께 길들이기를 연습했는데 여우는 남겨지고, 어린왕자는 자신의 장미를 찾아 떠납니다. 이처럼 길들이기란 서로 함께 이뤄가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과거를 영원한 현재로 만드는 능력
 
 어린왕자의 금발을 닮은 밀밭이 유달리 바람에 일렁이는 날이면 여우는 바보같이 두 팔을 벌리고 어린왕자를 만나러 달려갈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어린왕자의 금발이 아닌 밀밭에서 소리 없이 울어버릴지 모릅니다. 지금도 어디선가 밀밭 한구석이 들썩이고 있다면 그것은 바람이 아닌 여우의 울음일지 모릅니다. 어쩌면 어린왕자를 만나고 돌아오는 것일수도 있겠지요. 시간을 되살려내는 건 사랑의 힘이니까요. 상대방이 떠났다 해도 그때의 시간과 장소 그리고 열정 속에서 그 사람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마치 예술작품처럼 변치 않는 모습으로 말입니다. 그것이 추억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비슷한 경험들이 많이 있습니다. 처음 마주한 새벽하늘, 풀숲에서 발견한 작은 꽃, 처음 들은 귀뚜라미 소리, 불타오르는 노을빛, 어느 저녁 가슴에 파고든 첼로 소리 등등. 이런 기억들이 세월이 지나도 내안에서 '영원한 현재'로 살아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만남이 마틴 부버 Martin Buber가 말하는 우연한 마주침, 바로 조우 Encounter입니다. 그것은 어두운 나의 눈을 되찾아주는 '고향'처럼 아름다운 기억들입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것이 반드시 행복일까요? 그리고 행복은 꼭 아름다운 것일까요? 아닙니다. 때로는 고통도 하나의 아름다움이자 행복일 수 있습니다. 지나간 과거의 행복을 영원한 현재로 만드는 것은 고통스런 일입니다. 예술행위가 고통스러운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끊임없이 그 기억의 불씨를 살려내는 간절한 생명 연장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나도 함께 성장하는 아픔이기 때문입니다. 고통 없는 행복을 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 치열한 싸움에 지쳐서입니다. 누군가와의 사랑이 나를 (고통스럽고 아프게 하면서도) 성숙시키지 못했다면, 어쩌면 그것은 사랑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저 외로운 사람들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의지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혼자서는 견딜 수 없는 두 사람이 함께 동반의 외로움을 택하는 것이지요.
 진정한 사랑에는 창조적 능력이 있습니다. 여우는 밀밭에서 어린왕자를 살려내어 그 사랑을 영원한 현재로 만듭니다. 어린왕자는 떠났지만 아직도 그때의 사랑은 변함없이 여우를 더 성숙하게 '길들이고'있을 것입니다. 떠나간 뒤에도 홀로 남아 성장하는 사랑의 힘, 추억의 힘으로 말입니다. 그것이 <어린왕자>에게 보여주는 여우의 창조적 사랑법입니다.
 "그러니 넌 얻은게 아무것도 없잖아"
 "얻은게 있지. 저 밀밭의 색깔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