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지 못한 사람이 더 공격적이다-왜곡된 자기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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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이봉희 교수의 문학치유카페『내 마음을 만지다』p.101-106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나의 한계를 인정하는 건강한 수치심
살다보면 종종 공격적인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사랑받지 못한 사람들은 대개 공격적이기 쉽습니다. 말투나 행동에 상대에 대한 배려가 없어서(배려받지 못하고 자랐으므로) 나쁜 의도가 없는데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곤 합니다. 그런데도 자신은 전혀 알아채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또 스스로 상처를 입습니다. "왜 사람들은 나를 싫어할까?"하며 이유를 모른 채 아파합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을 인식하지 못하다보니, 자신 때문에 불편해하는 사람에게 또다시 상처를 입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실 선인장 꽃처럼 여린 살을 가졌습니다. 다만 살아남기 위해서 가시를 달고 사는 것이지요. 그것이 자신을 보호할 유일한 생존법이기 때문입니다. 그 가시로 남들에게 상처를 주는 줄도 모르면서 말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혼자서 외로워합니다.
상처 입은 사람들은 자기 확신이 없어서 늘 타인의 칭찬과 인정에 목말라 있습니다. 그러면서 누군가 자신을 칭찬하면 또 그 말을 잘 믿지 못합니다. 정에 목말라 타인에게 쉽게 마음을 주고 집착하고 기대하면서 다시 상처를 받습니다. 아니면 아예 마음의 문을 열지 않기도 합니다. 또 그들은 모든 일을 자신이 주도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혼자 하는 일에는 능력을 발휘하지만 여럿이 협력해야 하는 일에서 자신이 리더가 되지 못하면 힘들어합니다.
그녀는 못 뽑힌 구멍투성이다
믿을 때마다 돋아나는 못,
못들을 껴안아야 돋아나던 믿음
그녀는 매일 밤 피를 닦으며 잠이 든다
- 최문자, <믿음에 대하여>중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크든 작든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 중에는 늘 자신이 피해자라 여기며 '나는 약하며 참고 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끝까지 참아낼만큼 성인이 아닙니다. 결국 그 피해의식을 다른 어떤 형태로든 보상받고야 맙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상받기 위해서라도 누군가에게 공격성을 띠게 됩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자신은 피해자라는 굳은 믿음 때문에 누군가를 공격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나는 왜 당하기만 할까'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정당하다' '내가 옳다'는 아집에서 물러서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자기편을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어떤 이들은 '나는 고통 받았어,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당연해'라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며 마치 상처를 훈장처럼 달고 삽니다.
또한 상처가 많은 사람들은 옳고 그름이 너무나 분명해서 상대에게 가르치려고 하거나 무의식적으로 무시하기도 합니다. 자기 분석은 물로 타인을 분석하는 일도 뛰어납니다. 하지만 자기는 스스로 변화를 거부하며, 자신을 깨뜨리는 절망의 밑바닥까지 내려가지 못합니다. 그 고통스러운 절망에서 너무 오랫동안 도망쳐왔기 때문일까요? 이런 사람들은 누군가를 도와주고 충고하는 일에도 무척 관심이 많습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쓸모 있는 사람임을 끊임없이 확인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에게 자신의 상처를 옮길 수 있다는 사실은 생각하지 못합니다. '상처받은 치료자Wounded Healer'라는 말을 쉽게 사용하지만, 치유되지 못한 사람은 그냥 상처 입은 사람일 뿐입니다.
이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에도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일단 자신이 옳고 완전하다고 느끼면 더 탐구하기를 중단합니다. 사람이 옳다고 확신하면 배움의 기초가 되는 호기심을 멈추게 됩니다. 어떤 일에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깨닫지 못하며, 결국 배움을 멈추게 됩니다. 반대로 스스로 한계가 있는 존재며 완전하지 않음을 깨닫는 사람은 그 상처를 '건강한 수치심'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늘 깨어 있음으로 나의 한계를 인식하고 모든 일에 내가 옳다는 아집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미지의 것들을 탐험하며 나와 다른 타인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가시 끝에서 어여쁜 꽃을 피우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피터팬>의 작가 제임스 베리James Barrie는 우리가 나이가 들면 "삶이란 겸손을 배우는 길고 긴 수업"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말합니다.
공존의 거리를 존중하기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고슴도치 딜레마'가 있습니다.
숲속을 산책하다 우연히 고슴도치들을 만난 쇼펜하우어는 그들의 모습을 관찰합니다. 한겨울이 되자 고슴도치들은 서로의 체온으로 추위를 견디기 위해 가까이 다가갑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서로의 가시에 찔려 상처를 입고 놀라 물러나고 또 다가가면서 갈수록 서로의 가시에 찔려 상처를 입고 놀라 물러나기를 반복합니다. 그렇게 다가가고 상처 입고 물러나고 또 다가가면서 그들은 뭔가를 배우고 있었습니다. 바로 서로의 체온을 느끼면서도 상처를 주지 않는 적당한 거리였습니다. 고슴도치들은 그렇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추운 겨울을 견디고 있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고슴도치들을 보면서 인간관계도 그들과 같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상처를 치유 받지 못한 우리 모두는 선인장입니다. 자신이 받은 상처를 가시처럼 몸에 박아 다시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선인장입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서로 공존할 수 있습니다. 바로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적당한 거리를 배우는 것입니다. 조지아 오키프의 말처럼 누군가를 마음을 다해 제대로 보는 일은 긴긴 시간이 걸리는 일입니다. 공존의 거리를 배우기까지 상처투성이가 될지라도 서로에게 다가가는 시도를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서로의 체온은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 온기로 어느 날 가시투성이의 몸에서도 어여쁘고 작은 꽃이 피어날 것입니다.